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칼라스 (문단 편집) == 음악 성향 == 그리스 시절에는 상술한 대로 달베르의 '저지'(Tiefland)와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한 기록도 있고, 이탈리아 경력 초반에는 [[요제프 하이든|하이든]]의 오페라[* 하이든 말년의 작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였는데, 이 51년 피렌체 공연은 무려 세계 초연 되시겠다. 몇몇 잊혀졌던 작품들을 성공적으로 리바이벌시킨 칼라스지만, 초연 공연자로 기록을 남긴 건 이 작품이 유일하다.]나 오라토리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공연한 기록도 있지만, 일단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만을 중심 레퍼토리로 삼았다. 다만 리사이틀이나 녹음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카를 마리아 폰 베버|베버]], 바그너 등 독일어권 작곡가와[* 다만 모두 이탈리아어를 원어로 한 곡이었고, 독일어 원어 곡도 이탈리아어나 영어 개사판으로 불렀다.] 불어권 아리아들도 종종 불렀다. 음악사적으로 칼라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조아키노 로시니|로시니]], [[빈첸초 벨리니]], [[가에타노 도니체티|도니체티]]로 대표되는 이른바 벨칸토(bel canto. 탐미주의) 오페라 레퍼토리를 20세기에 부활시킨 일이 될 것이다. 칼라스의 데뷔 당시 오페라의 대세는 [[자코모 푸치니|푸치니]]를 위시한 베리스모(verismo. 사실주의) 오페라였다. 벨칸토 오페라 중 노르마나 루치아 같은 대작들은 여전히 공연이 되었지만, 루치아는 가수들의 기교 과시용 오페라로 인식되었고,노르마는 전설적인 오페라 가수들인 Rosa Ponselle (파바로티는 생전에 로사 폰셀에 대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은퇴한 그녀의 자택을 여러 번 찾아가 음악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도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우리들 중 가장 위대한 가수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Gina cigna.Zinka Milanov등의 가수들에 의해 짧게짧게 공연되었지만, 칼라스는 안정된 고전적 벨칸토 창법과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 구닥다리로 전락한 벨칸토 오페라의 음악적/극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중 하나였던 푸치니의 베리스모 오페라 [[토스카]]는 인터뷰에서 주인공 토스카의 캐릭터성과 2막에서의 2중창이 다소 인형극같다며 마음에 들지 않아 역할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인터뷰에서 가수가 공연하는 오페라를 싫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자신은 항상 토스카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일단 무대에 서면 자신은 모든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한정되어 있지만, 역할의 성격과 목소리 특성면에서는 칼라스만큼 폭넓은 영역을 선보인 가수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스타일적으론 케루비니나 스폰티니의 고전주의 오페라부터 푸치니의 베리스모까지, 성악적으로는 콜로라투라 기교가 넘치는 루치아부터 소프라노가 부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역할인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쿤드리까지, 극적인 면에서는 연약한 소녀 [[나비부인]]부터 사자처럼 포효하는 메데아까지 넘나든 것이다.[* 좀 극단적인 예로, 드라마틱에서 정통 벨칸토 레퍼토리로 넘어가던 52년 한 해에 부른 작품들만 따져도 전형적인 드라마틱/스핀토 역할인 푸치니 '토스카', 베르디 '아이다'와 폰키엘리 '조콘다', '리골레토', '멕베스',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라 트라비아타' 같이 리릭(혹은 드라마틱)에서 콜로라투라까지 두루 필요한 초기 베르디 작품들, 벨칸토 오페라들인 벨리니 '노르마', '청교도', 도니제티 '루치아', 로시니 '아르미다(기교적으로 심각학 난해한 로시니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평가되는)', 거기에 모짜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를 망라한다. 기술적으로나 극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한 해 동안, 그것도 상당수는 새로 배워가며 ('리골레토', '멕베스', 아르미다', '후궁에서의 도주'는 모두 이 해 한 시즌만 공연했다) 소화한 가수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하다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칼라스를 놓고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은 '역사상 여성 목소리를 위해 쓰여진 어떤 작품이라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넓은 영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음악적 자질과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 그리고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스 시절 문단에 쓴 바와 같이,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우던 시기부터 자신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 수업 뿐 아니라 음악원 커리큘럼의 가능한 모든 과목을 청강해 가며 성악 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친 지식을 모두 습득하려고 했다. 흔히 칼라스를 연기력이 빼어난 가수라 칭하지만, 그녀는 철저히 음악을 바탕으로 드라마를 이해했지 음악적 이해의 부족을 연기로 메꾸는 가수가 아니었다.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 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또 오페라에서 비음악적 표현을 동원하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의 성향은 생애 후반이었던 1970년대에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개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성악가들에게 칼라스는 끊임없이 텍스트의 이해, 정확한 기교, 몸에 앞서 목소리로 연기할 것을 강조하고, 악보에서 벗어난 장식음이나 한숨, 웃음 같은 비음악적 표현을 집어넣으면 가차없이 제지하고 있다. 칼라스는 이런 엄격한 잣대를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동료 가수나 극장 매니저 측에도 똑같이 요구했고, 이는 종종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칼라스를 '해고'한 것으로 유명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극장장 루돌프 빙은 훗날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내가 만난 가수 중 가장 지적이었다. 그녀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다른 가수들처럼 적당히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극장장으로서 그런 그녀와 일하기란 무척 어려웠다."라고 회고했다. 1950년대 초반에 칼라스와 함께 녹음과 공연을 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카라얀]]도 "리허설 첫 날부터 칼라스가 악보를 들여다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 역할 뿐 아니라 오페라 전체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건 지휘자에게는 큰 위협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 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 칼라스의 음색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르마에서 포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 급격한 다이어트, 무리한 일정, 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 전설적인 연기력을 눈으로 확인할 영상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 이미 목소리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에 촬영된 열악한 화질의 영상만으로도 칼라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오페라 연기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62년 함부르크 리사이틀에서 카르멘을 부르는 영상, 65년 파리에서 노르마를 리허설하는 짧은 영상을 보면 호들갑스런 동작 없이 목소리와 혼연일체된 절도 있는 손 제스처와 시선 처리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칼라스와 여러 번 함께 작업한 지휘자 안토니노 보토(1896~1985)는 "칼라스를 단순히 가수로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무대 위 그녀는 음악가이며 배우이며 무용수이며 음유시인이다. 한 마디로 칼라스는 완벽한 공연 예술가다"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